욕실 장면

욕실 장면

조용히 욕실 안으로 스며든 햇빛

그림을 처음 보면, 따뜻한 공기부터 느껴집니다.

욕실 안으로 햇빛이 천천히 번지고, 욕조 안에는 한 여인이 조용히 몸을 담그고 있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 같습니다.

하지만 보나르는 바로 그런 순간을 사랑했던 화가였습니다.

빛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억을 그린 화가

피에르 보나르는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선을 단순하게 정리했습니다.

대신 색이 살아 있죠.

특히 그는, 빛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퍼지는지를 아주 감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현실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어떤 순간의 공기와 온도를 다시 꺼내 보여주는 것 같죠.

평생 한 여자를 그린 화가

그림 속 인물은 보나르의 연인, 마르트입니다.

보나르는 그녀를 평생 380점 넘게 그렸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은 늘 흐릿합니다.

빛 속에 녹아 있거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죠.

어쩌면 그는 사람의 형태보다,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를 붙잡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도 참 묘합니다.

마르트는 처음 만났을 때 이름과 나이를 모두 숨겼고, 보나르는 결혼 후 30년이 지나서야 진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생 그녀를 그렸습니다.

두 사람만의 공간, 욕실

마르트는 목욕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보나르는 그녀를 위해 집 안에 욕실을 만들어줬고, 이후 욕조 장면은 그의 그림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에게 욕실은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의 체온과 습관이 머무는 장소였죠.

그래서 이 그림은 누군가를 훔쳐보는 장면이 아니라, 오래 사랑한 사람의 시간을 조용히 기록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피부 위로 번지는 보랏빛과 녹색빛

이제 피부를 자세히 보세요.

보랏빛과 녹색빛이 은은하게 섞여 있습니다.

실제 피부색과는 다르죠.

하지만 보나르는 정확한 색보다, 빛이 피부에 닿을 때 생기는 분위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빛 안에 녹아드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선명하지 않아서 더 오래 남는 그림.

보나르의 그림은 꼭 오래된 기억처럼, 천천히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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