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동물이 뒤섞여 있고, 거대한 과일이 떠다니고, 악기 위에서는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죠.
그런데 사실, 이 그림의 진짜 시작은 펼쳐진 화면이 아닙니다.
먼저 그림을 닫아야 합니다.
세폭제단화
이 작품은 ‘세 폭 제단화’입니다.
성당에서 사용하던 그림이라, 양쪽 패널을 접었다 펼 수 있도록 만들어졌죠.
그리고 그림을 접으면,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납니다.
회색빛의 둥근 지구.
아직 태양도, 달도, 생명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던 셋째 날의 모습이죠.
그리고 왼쪽 위를 자세히 보세요.
작게 그려진 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런데 표정이 이상합니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가 있죠.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을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처럼 보입니다.
에덴동산에도 악마는 숨어 있었다
이 작품을 펼쳐서 보시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우리도 왼쪽부터 천천히 따라가 보죠.
Point 01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브를 소개해 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아담의 표정을 보세요.
자신과 닮았지만 또 전혀 다른 존재를 처음 본 사람처럼, 어딘가 놀란 얼굴입니다.
가운데에는 생명수가 흐르고, 주변에는 온갖 동물과 식물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낙원. 에덴동산이죠.
하지만 보스의 그림에서는, 천국조차 완전히 안전하지 않습니다.
Point 02
연못 안에 이상한 생명체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새의 부리, 물고기의 몸,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책을 읽고 있는 괴상한 존재가 보이시나요? 바로 사탄입니다.
보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악은 이미 아주 처음부터 세상 안에 들어와 있었다’고 말이죠.
이 그림은, 여기서부터 점점 미쳐가기 시작합니다.
Point 03
이제 중앙 패널을 보세요
아까의 순수한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뒤엉켜 있고, 과일은 비정상적으로 거대해졌으며, 동물 위를 탄 인간들이 끝없이 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습니다.
위쪽의 큰 물줄기는 성경 속 네 개의 강입니다. 즉, 이곳이 현실 세계, 인간의 세상이라는 뜻이죠. 가운데 연못에서는 수많은 여인들이 목욕을 하고 있고, 그 주위를 남성들이 동물을 탄 채 빙빙 돌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남성이 동물을 타는 행위를 성적인 상징으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인간 욕망의 축제를 보여주는 셈입니다.
Point 04
체리, 딸기 같은 붉은 과일들이 사람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이런 과일은, 탐욕과 성적 쾌락을 상징했습니다.
욕망이 인간보다 더 커져버린 거죠.
Point 05
투명한 유리구슬 안에서 남녀 한 쌍이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리에는 금이 가 있습니다.
이건 플랑드르 지방 속담을 표현한 장면입니다.
‘행복은 유리처럼 쉽게 깨진다.’
보스는 인간이 붙잡으려 하는 쾌락과 행복이, 사실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거죠.
Point 06
그 아래 꽃 주변을 보면, 유리관 안으로 쥐 한 마리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유리관은 남성의 생식기를 상징하고, 쥐는 사람을 유혹하는 악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림 전체가, 끊임없이 인간 욕망과 타락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학자들은 중앙 패널을 두고 계속 논쟁합니다. 이곳이 인간이 자유롭게 욕망을 즐기는 낙원인지, 아니면 이미 타락해버린 세상인지 말이죠.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혼란과 쾌락의 끝에는, 반드시 오른쪽의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Point 07
이제 마지막 패널, 지옥을 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거대한 하프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하프 줄에 묶인 채 연주를 당하고 있죠. 이 사람은 생전에 음악과 향락에 빠져 살았기 때문에, 죽어서도 끝없이 음악을 연주하는 벌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는, 악보까지 등장합니다.
재미있는 건, 실제로 현대의 한 연주자가 이 악보를 해석해 연주해 본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말 그럴듯한 음악이 나왔다고 하죠.
보스는 기괴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상상했던 화가였습니다.
Point 08
파란 괴물이 인간을 삼키고 있습니다.
먹힌 인간들은 아래 구덩이로 떨어집니다.
그 속에서는 탐욕, 식탐, 방탕 같은 죄를 저질렀던 인간들이 벌을 받고 있죠.
엉덩이로 동전을 토해내는 사람은 탐욕의 벌을, 끝없이 구토하는 사람은 식탐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지옥은 결국, 인간이 생전에 저질렀던 욕망의 결과인 셈입니다.
Point 09
달걀 껍데기 같은 몸통, 나무 다리, 그리고 사람 얼굴을 한 거대한 존재
이 얼굴은 바로, 화가 보스 자신의 얼굴입니다.
왜 그는 굳이 자기 자신을 지옥에 넣었을까요?
답은 몸통 안에 있습니다.
껍데기 안에는 악마들이 쉬어가는 술집이 있거든요.
보스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나 역시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고백에 가까운 셈입니다.
단순히 인간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죄의 세계 안에 포함시키고 있는 거죠.
그래서 보스의 그림은 더 무섭습니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을 떠올려 보세요.
닫혀 있던 그림 속, 세상을 바라보던 신의 얼굴.
왜 그렇게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보스는, 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이 결국 욕망과 죄를 반복하며 살아가게 되리라는 걸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그림이 단순히 인간을 비난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보스는, 욕망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던 화가에 가까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