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산
우산을 쓴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파리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스쳐 지나가고,
검은 우산들은 화면 위를 물결처럼 채우고 있죠.
그런데 이 그림을 오래 보다 보면
묘하게 다른 공기가 느껴지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왼쪽의 여인입니다.
혼자 우산을 쓰지 않은 채 걸어가고 있죠.
화면 속에서 가장 다른 사람
왼쪽 여인을 자세히 보세요.
옆에 있는 인물들보다 색이 조금 더 차분하고, 형태도 또렷합니다.
반면 오른쪽의 모녀는 훨씬 부드럽고 밝습니다.
붓질도 가볍고 공기처럼 흩어지는 느낌이 있죠.
같은 그림인데도 분위기가 다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르누아르는 이 작품을 한 번에 완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년의 시간 차이가 남긴 흔적
르누아르가 처음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1881년입니다.
당시 그는 전형적인 인상주의 화풍으로 작업하고 있었죠.
오른쪽에 보이는 우산 쓴 여성과 두 아이, 그리고 뒤편의 여성까지.
처음에는 이 네 명만 그렸습니다.
그래서 이 인물들은 밝고 부드럽습니다.
빛이 스며드는 듯하고, 색은 공기처럼 흩어지죠.
그런데 르누아르는 그림을 완성하지 않은 채 멈춰둡니다.
그리고 4년 뒤인 1885년, 다시 이 그림 앞으로 돌아옵니다.
그 사이 르누아르의 화풍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인상주의에서 더 단단한 그림으로
1885년의 르누아르는 이전보다 훨씬 고전적인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형태를 더 분명하게 그리고 싶어 했고,
인물의 구조와 윤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죠.
그래서 나중에 추가된 왼편의 여성과 남성, 그리고 우산들은
훨씬 직선적이고 단단해 보입니다.
색도 조금 더 어둡고 묵직하죠.
한 화면 안에서
초기의 르누아르와 변화 이후의 르누아르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우산》은 단순한 거리 풍경이 아닙니다.
한 화가가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어 가는 순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림입니다.
파리의 유행도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패션에서도 시간 차이가 보인다는 점입니다.
오른쪽 여성의 옷을 보세요.
풍성한 벨벳 재킷과 화려한 장식 모자.
1881년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입니다.
반면 왼편 여성은 훨씬 단정합니다.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절제된 옷차림이죠.
르누아르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그림은 당시 파리의 패션 변화까지 함께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비 내리는 거리 위에 남은 변화의 순간
인상주의 화가들은 늘 “순간”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빛, 날씨, 공기의 움직임 같은 것들이었죠.
그런데 《우산》은 조금 다릅니다.
이 그림 안에는 비 오는 하루의 순간뿐 아니라,
르누아르라는 화가가 변해가던 시간까지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를 가득 메운 우산들보다,
서로 다른 시간 위에 서 있는 인물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